MY DIARY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ENARO 2009. 5. 9. 09:44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울고 있는 아이의 모습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정원 한모퉁이에서 발견된 작은 새의 시체 위에

초가을의 따사로운 햇볕이 떨어져 있을 때

가을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가을비 쓸쓸히 뿌리고

사랑하는 사람의 발길이 끊어져

거의 한 주일이나 혼자 있게 될 때.

 

아무도 살지 않는 고궁.

그 고궁의 벽에서 흙덩이가 떨어지고,

삭아 버린 창문 틀 위에

'아이세, 내 너를 사랑하노라......'라는

거의 알아보기 힘든 글자가 씌어 있는 것을 볼 때.

 

많은 세월이 흐른 뒤에 문득 발견된

돌아가신 아버지의 편지.

그 편지에는 이런 사연이 적혀 있었다.

'사랑하는 아들아, 네가 저지른 짓 때문에

내가 얼마나 많은 밤을 잠 못 이루고 지샜는지 모른다......'

대체 내가 저지른 짓이란 무엇이었던가.

유치한 장난이었을까?

아니면 거짓말?

아니면 연애 사건?

그 숱한 허물들도 이제는 기억에서 사라져 버렸는데

그때 아버지는 그것 때문에 가슴을 태우셨던 것이다.

 

동물원의 우리 안에 갇혀 초조하게 서성이는

한 마리 범 또한 우리를 슬프게 한다.

언제 봐도 쇠 울타리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그 동물의 번쩍이는 눈동자,

무서운 분노,

고통에 찬 울부짖음,

앞 발톱에 서린 끝없는 절망감,

미친 듯한 서성거림,

이 모든 것들이 우리를 더없이 슬프게 한다.

 

훨덜린(독일의 시인)의 시, 아이헨도르프(독일의 시인이자 가곡 작가)의 가곡.

 

엣 친구를 다시 만났을 때.

학창 시절의 친구 집을 방문했을 때,

그것도 그가 이제는 존경받는 지위가 높은 관리,

아니면 부유한 기업주가 되어,

몽롱하고 우울한 언어나 읊조려 대는 한낱 시인에 불과한

우리에게 손을 내밀기는 하지만,

이내 외면하려는 태도를 취할 때.

 

사냥꾼의 총부리 앞에 죽어 가는 한 마리 사슴의 눈초리.

재스민 향기.

그 향기는 나에게 늘,

창가에 오래된 고목이 서 있던 내 고향을 떠올리게 한다.

 

가을 하늘을 날아가는 해오라기 한 마리.

추수가 지난 뒤의 텅 빈 논과 밭.

술에 취한 여인의 모습.

 

어린 시절에 살던 마을을 다시 찼았을 때

그곳에는 이미 당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고

일찍이 뛰놀던 놀이터에는 거만한 붉은 주택들이

들어서 있는 데다가,

당신이 살던 집 창가에서는 낯선 얼굴이 내다 보고

왕자처럼 경이롭던 아카시아 숲도 이미 베어져

없어지고 말았을 때,

이 모든 것이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 한다.

 

하지만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이 어찌 이것뿐이랴.

 

오뉴월의 장례 행렬.

가난한 노파의 눈물.

거만한 인간.

보라색과 검정색, 회색 빛깔들.

둔하게 울려오는 종소리와 징소리.

바이올린의 G현.

가을밭에서 보이는 연기.

산길에 흩어져 있는 비둘기의 깃털.

자동차에 앉아 있는 출세한 여인의 좁은 어깨.

유랑 가극단의 여배우들.

세 번째 줄에서 떨어진 어릿광대.

지붕위로 떨어지는 빗소리.

휴가의 마지막 날.

 

사무실에서 묵은 서류를 뒤적이는 처녀의 가느다란 손.

보름 밤 개 짖는 소리.

크누트 함순(노르웨이의 소설가)의 두세 구절.

굶주린 어린아이의 모습.

철장 안으로 보이는 죄수의 얼굴.

무성한 나뭇가지 위로 내려 앉는 흰 눈송이.

 

이 모든 것 또한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다.

 

 

 

*안톤 슈나크(Anton Schnack, 1892-1973)

  독일 출신의 작가. 뮌헨에서 문학과 음악, 철학을 공부하고, 다름슈타트, 마인츠, 프랑크푸르트에서

  신문 기자로 활동했다. 낭만과 서정성을 지닌 작가로, 특히 짧은 산문의 대가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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