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ARO's POEMS 10(가을 생각/포석정/비가 내린다/자화상/이태백 시 한 수)
어느 날 부턴가 나는
파도치는 세월에 쫓겨
서른 넷 가을 날 여기까지 왔습니다
다가오던 이를 눈짓으로 흘리며
가려던 사람을 가슴 속 불을 지펴
막아서던 애꿎은 놀음이 하늘에 걸립니다
아무 것도 모른 채
정녕 가시같은 사상도 없이
‘나는 나’ 라는 빈 껍질만 두르고 살았습니다
출근길 아들놈 하얀 잇몸속에서
내겐 미소가 어울린다는 걸,
알면서도 애써 인상 지으며 살았다는 걸...
문득
푸르게 늙어가는 가을 날 아침 나절
작은 내가 웃으며 다시 길을 나섭니다
2001 , 8 , 24 .(金)
포 석 정
흙벽이되 검은 폐허가 아니고
사내는 그릇을 정으로 닦고
아낙은 술병을 미소로 치운다
가득, 토해지는 노래 자락 군데 군데
세상이 어우러져 딩가당 춤사우l,
군대 갔다 죽은 친구놈이 걸어 나온다
‘꽃반지 끼고’
그 놈은 결국 꽃반지를 끼지 못했다
빌어먹을 노래 탓이려니
‘그 여자는 꽃반지 숨겨 울며 시집을 갔다’
술사발에 묻혀
하늘이 땅 아래 엎드리는 참회의 시각
나는 포석정 구석 자리 앉아
과거만 숭숭 구멍 뚫고 있다
아, 기똥찬 의식 상실의 밤이여
2001 , 9 , 3 .
비가 내린다
비가 내리면 으레
담배 한 개피 불지르고 싶다
베란다 한 켠에서
차단용 유리문을 닫아 건다
-이제는 결코 생각하지 않으리라-
벌레 한 마리 매달려 있다
그녀는 나를 보고
나는 그녀를 본다
그녀가 갇혀 있는 건가
내가 갇혀 있는 건가
-담배 연기를 훅- 뿜어 본다
내가 갇혀 있다는 걸 알겠다
내가 내 안에 빨간 죄를 짓고
들어 앉아 있다는 걸 새삼 알겠다
비오는 날이면
파란 담배 연기 타고 한번 날고 싶다
저 벌레, 저 비처럼
2001 , 9 , 9 .
자 화 상
존경하는 진주 청년 문학회 회원님들께
기껏 공기나 바늘로 콕콕 찔러
피터짐 맛보며 나의 목숨인양
사랑 구걸하는 아마츄어 시인보담
내 식어가는 응어리를 꼭, 터뜨리고 싶다
할 말이 많은 만큼 나를 줘패고 싶다
“더 달아나는 게 필요할 걸”
아이 하나 낳고 한 걸음,
곧 한 걸음을 더 달아나겠지
이제 그 곳이 어디란 걸 알아, 나의 종착지
흔적을 지우지 말아야 해
정작 내가 아파한 이유를 두들겨야지
현학의 파편 모서리마다
내가 긁혀 있었어
산소와 수소를 썩혀 물을
만들어 마시니 취하더라구
미친 듯 내가 그 자리에 있더라니까
당신들 뒤에...
2001, 9, 26.
- 이 태백의 詩 한 수 -
꽃 아래 한 독 술을 놓고
잔 들자 이윽고 달이 떠올라
그림자 따라 세 사람일세.
달은 술을 마실 줄 모르고
그림자만 날 따라 다니오.
달과 그림자 데리고서
함께 즐기는 이 기쁨이여.
- 나의 결혼 선물로 김기정씨가 준 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