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ARO's POEMS 9(/외출/안개/기차안에서/가을엔/LOVERS)
외 출
그냥 픽 스러진 낙엽에도
바람은 운다
하늘로 가자고
파리떼, 소주, 담배, 골방
죽음의 문패
뒹군다
가슴, 우유병, 시계, 눈물, 의식
일어선다
옷을 입는다
방문을 밀치고
나선다, 땅으로
-후후, 담배나 사야지-
1987, 7, 20.
안 개
지나쳤지만
내리진 못했던 곳
아무도 나를 찾지 않던 비 내리는 마을
오늘은 그 곳에 나를 내릴 거야
떠나는 건 슬프고
가다리는 건 아프지
그것도 행복이 될 거라고 나는 다시 가고 있어
저 켠 너머 산에 안개가 서려
헤치면
산이, 또 산이 이어지고
그 중간에 네가 있는 걸 알아
안개는 제 스스로 나타나
스스로 몸을 숨기지
마치 사랑처럼
그 안개 속으로 내가 가고 있어
그 가운데 네가 있기에
기차안에서
2001 , 7 , 21(土)
기차안에서
오늘은 모든 게 멋있어
창밖을 스쳐 흐르는 빗방울들
아이들의 소란
뒷 좌석 노인과 학생과의 대화
사각진 콘크리트 아파트들
철탑, 그 뒤 희뿌연 안개
잠시 후 이 열차는 대전,
대전역에 도착하겠습니다, 라는 안내 방송
그 말에 가슴이 뛰고 있어
가다림도 고통도 없이 달려가고 있어
오늘은 정말 모든 게 멋있어
미소 건너 또다른 길
나를 다시 데려갈 그 길
헤어짐도 멋졌으면 좋겠어 2001 , 7 , 21 .(대전역을 지나며)
가 을 엔.....
가버린 사람의 파란 행복을 위해
소박한 설레임으로 기도하는 詩를 사랑하자
폐허로 향하는 길목에서 고독한
빗줄기마냥 공허한 미소를 지으며
둘이 살던
도시의 퇴락된 빈 공간을 찾아가 들치면
심장 가득 신음하는 너의 술, 나의 담배
죄다 묻어 두고 가야 하는 남의 하늘 아래
너무나 많은 걸 사랑한 죄로 하여
삶이 찌들어가도
가을엔
추억의 신자로 엎드릴 수 있다는 그 이유만으로도
우리네 잠궈 논 사랑을 풀자
1991, 11, 17.
LOVERS
운동장엔 철벅 철벅 비가 내립니다
우리는 오늘도 하나의 게임을 준비합니다
애당초 조건은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빗소리가 심장 가득 몰려 와도
빠알간 우리의 피를 밀쳐낼 순 없습니다
소리는 인간의 함성 소리, 가장 투명하고
먹구름도 우리의 하늘을 다 메우진 못합니다
가을 노래 마냥, 수업은 끝이 나고
운동장만한 넓은 세계는 찾을 수 없기에
하나, 둘... 반갑게 모여듭니다
우리는 하나의 게임을 치르고 있습니다
그건 정직하고 자랑스런 공차기입니다
돌려 차면 돌아가고
하지만 이 둥근 세상은
서로의 바램따라 움직여주진 않습니다
공의 존재 이유라 할까요
게임은 발놀림으로 진행되지만
우리의 가슴엔 온 세상이 터억 안깁니다
공만한 인생 저울을 대할 수 없어
우리는 오늘도 무던히 하나의 게임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1990, 9, 13.
대학시절 LOVERS라는 축구클럽에서 비오는 날 공차던 하루